2009년 1월19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 모습
법관이 틀렸고 배심원이 맞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의 ‘법률 상식’이, 전문 법관의 ‘법률 지식’보다 앞설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무죄 판결에 인색한 법관의 태도에도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저는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모(43)씨는 지난해 11월 강간상해죄로 구속됐고, 무죄를 주장하며 참여재판을 신청했습니다. 참여재판이란 일반 시민 6~9명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는 물론 양형까지 평결하는 제도입니다. 판사가 배심원의 평결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구속력은 없지만, 90% 가까이 의견 일치를 봅니다. 대상범죄는 살인, 강도상해, 상해치사, 강간상해, 뇌물 등 중범죄이며 피고인이 요청하면 법원이 받아들일지를 결정합니다. 지난 5월31일까지 86건(피고인 90명)이 진행됐습니다. 이씨에 대한 참여재판은 지난 1월20일 법관 3명과 배심원 9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지법에서 열렸습니다.
사건 개요는 이렇습니다.
2008년 10월29일 인천 부평구 부개동의 한 국밥집에서 이씨 일행은 우연히 A(50·여)씨 일행과 합석했습니다. 이들은 A씨를 따라 근처 사우나로 자리를 옮겨 2차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사우나는 A씨가 종업원으로 일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날 밤 1시4분쯤 112로 A씨가 전화를 겁니다. “제 집에 남자가, 못된 놈 그냥 이 남자 데리고 가야 해요. 얻어맞을 거 같아서 꼼짝도 못하고 옆에서 달래고, 개놈의 새끼 경찰 보내줘요.”
경찰이 사우나에 출동했을 때 이씨는 옷을 벗은 상태로 A씨의 방 침대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A씨의 상의와 속옷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방바닥에는 오줌으로 보이는 액체가 흘렀습니다. 다음날 A씨는 이비인후과 병원에 찾아가 코뼈골절상을 입어 3주간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상해진단서를 발부받았습니다.
이씨는 법정에서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간·폭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피해자 A씨는 “내 주변에 깡패가 많이 있다.”고 협박하며 머리를 잡아 방바닥에 내리쳤고, 옷을 벗긴 다음 성관계를 하려 했다고 비디오 중계로 증언했습니다. 또 이씨가 나가지 못하게 막아서 방바닥에 소변을 봤다고 진술했습니다.
술자리를 함께했던 3명이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 아들이 군대에 입대했다는 얘기를 나눴고, ▲ 이씨가 여탕을 구경시켜 달라고 해서 A씨랑 들어갔는데 A씨가 나왔을 때 립스틱이 번져서 두 사람이 키스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 두 사람이 상당히 취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배심원 8명은 피해자 A씨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무죄를, 나머지 1명은 상해죄만 유죄로 평결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배심원 평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죄로 인정해 이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 이씨가 A씨와 성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했다고 보이고, ▲ 강압적인 태도가 없었다면 피해자가 방바닥에 소변을 볼 이유가 없으며, ▲ 피해자가 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하는 부위와 진단서상 상처부위가 일치한다 등의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판결은 또다시 뒤집혔습니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이 배심원단의 평결대로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이유는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는 등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 피해자의 속옷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 경찰 진술에서 코 부위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소변도 가해자의 것인지, 피해자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대법원도 항소심의 판결이 정당하다며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무죄 판결에 대해 우리는 간혹 오해를 합니다. 무죄라고 확신이 들 때 무죄 판결을 내린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유죄라고 확신하기 어려우면 무죄라고 판결한다는 게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무죄 추정의 원칙’입니다. 다시 말해 유죄라고 확신이 들 때만 유죄라고 판결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무죄라고 판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형사사건의 무죄율이 2.9%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는 신기합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율이 10%로 높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유죄라고 보기 의심스러우면 무죄를 선고한다는 법률 원칙을 판사보다는 배심원이 오히려 더 잘 따르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건을 다루는 판사는 아무래도 피고인의 법정 진술보다는 검찰이 작성한 수사기록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은 검찰의 수사기록을 보지 않고, 검사가 재판에 내놓은 물적 증거와 피해자 등 증인의 법정 진술로만 유·무죄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배심원이 유죄 선입견이 없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결과, 참여재판 86건(피고인 90명) 가운데 9명(10%)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유죄로 판결된 사건 가운데 8건에서는 배심원 무죄―재판부 유죄로 결론이 엇갈렸습니다. 그 재판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면 무죄율은 20% 정도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참여재판은 시범 시행 중입니다. 2013년에 정식 도입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신청 피고인이 예상보다 적다며 중단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의 탁월한 법률 상식을 판사들이 한 수 배울 수 있도록 참여재판이 지속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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