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대중(사진 왼쪽) 전 대통령이 2004년1월8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303호 법정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 출석해 재판장 신영철(사진 오른쪽) 부장판사의 질문을 받고 있다.


 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곳은 법정입니다. 2004년 1월29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재심 선고가 있던 날, 김 전 대통령은 재판이 시작하기 10분 전에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정문에 들어섰습니다. 취재진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포토라인을 만들었고, 저는 포토라인 뒤쪽에서 김 전 대통령을 지켜봤습니다. 언제나처럼 지팡이를 짚고 위태롭게 걷는 김 전 대통령의 옆을 이희호 여사가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변론을 맡은 최재천 변호사(열린우리당 전 국회의원)가 김 전 대통령을 부축했습니다. 표정은 담담했습니다.
 
 1980년 계엄사령부의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재심 재판에서 내란음모와 계엄법 위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군부가 김 전 대통령 등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조작했음을 법원이 인정한 것입니다. 당시 함께 재판을 받았던 고 문익환 목사 등 20명은 2003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이라 재심 재판을 미뤄왔던 것입니다.
 
 다음은 무죄 판결을 받고 나서 김 전 대통령이 밝힌 소감입니다.
 
 “최종적으로 법에 따라 신군부를 단죄하고 무죄임이 밝혀졌다. 국민과 역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독립된 사법부가 건재해 이런 잘못된 재판이 다시는 이 나라에 없기를 바란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은 1980년 1월8일 재심 재판에 나와 최후 진술도 했습니다.
 
 “(남산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던 때를 회상하며) 옷을 벗기고 모욕감을 주던 일, 며칠씩 잠을 안재우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신문하던 일 등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끌려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것은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빨리 죽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결국, 조사관 마음대로 조서를 작성하게 했다.
 
 나도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목숨을 구걸하려고 당장 타협하면 영원히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죽는 것이 역사에서 사는 것이라고 다짐하며 이겨냈다. 법정에 다시 서게 돼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역사상 많은 위인이 역도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지만, 우리는 당대에 살아서 이렇게 다시 재판을 받게 됐으니 세상이 참 좋아졌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재심을 맡았던 재판장이 ‘법관의 독립을 훼손했다’고 경고받은 신영철 현 대법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날 저는 신 부장판사의 재판 태도에 좀 놀랐습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다른 피고인과 비교되게 김 전 대통령을 ‘특별대우’했기 때문입니다. 법정을 언론에 공개해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법정에는 피고인이 먼저 들어와 앉아있고, 시간에 맞춰 재판장이 들어옵니다. 피고인은 물론 방청객도 모두 일어나 예의를 갖춰 재판장을 맞이하고 그가 앉으면 피고인 등도 따라 앉습니다.
그러나 그날 신 부장판사는 ‘피고인 김대중’이 앉을 때까지 서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법대 앞으로 기울여 김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을 얘기하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대법원장님께서 청와대에 방문했을 때 대통령님을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가 대법원장 비서실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신 부장판사의  배려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모든 피고인에게 ‘따뜻한 판사’가 아니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기에 왠지 씁쓸했습니다. ‘법 앞에 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제가 ‘지나치게’ 짝사랑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덧붙임: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한 육군계엄부의 고등군법회의와 대법원 판결문 핵심 내용과 전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판결문 전문-1981년 (http://ejung.blog.seoul.co.kr/86)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법 판결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무죄 판결문 전문-2004년(http://ejung.blog.seoul.co.kr/87)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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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희망천배 천정배 2009/08/19 22:30 삭제

    Subject: 세브란스 빈소를 다녀오다 - 謹 弔 김대중 전 대통령

    지금은 어딜가나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지요. 세브란스 빈소는 어떤 모습일까요? 끊이지 않았던 정치인들과 유명인사의 조문행렬, 어마어마한 취재열기. 국회 광장으로 옮겨지기 전에 꼬마기자 최가 담아왔습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는 지하2층 특1호실 입니다. 기자들로 정신 없는 1층. 기자들 무릎 다 닳겠더라고요. 정진석 추기경을 인터뷰하는 수많은 기자들. 인터뷰 사이좋게 나눠갖네요. 땅바닥에 앉는 것은 기본! 지난 5월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장..
  1. 정운현 2009/08/19 11:36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참으로 귀한 글이군요.
    이런 사실들을 기록하는 기자가 진정한 기자입니다.
    더러 이곳을 들러 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후에 올리시는 글도 기다려서 읽어보겟습니다.

  2. 묵필 2009/08/19 12:17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하지만 그때의 신영철과 지금의 신영철은 다른걸요.

    이 글을 보고 느낀점은 신영철 역시 권력에 눈이 멀고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뭐 그런 사람정도로 비춰집니다.

    • BlogIcon 꿈뱀파이어 2009/08/19 15:36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신영철 대법관에 대한 저의 첫 인상입니다.
      그전, 그후 몇 차례 더 신 대법관을 만났지만, 그때 기억이 가장 강력히 남아있습니다.

  3. 음.. 2009/08/19 13:05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신영철은 그냥 시류에 영합해서 다른분 말씀대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스타일로 보이네요.

    • BlogIcon 꿈뱀파이어 2009/08/19 14:23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재심 재판이라는 게 법원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자리라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좀더 따뜻합니다.
      다만, 그 강도가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4. 글쎄요/. 2009/08/20 08:10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그냥 신영철 대법관은 시류 흐름을 잘 읽는 사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뭐 개인의 인상이라는 걸 구태여 반론하고 싶은 맘은 없지만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상징성과 영향력을 알고 있었던 거고, 재심판결이라는 상황도 있었으니 계산된 행동으로 최대한 그리 한 거지 싶습니다. 진정 김대중 대통령에게 존경심이라든가 하는게 있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었던 행동들은 할 수 없었을 거 같은데요.

    우리네가 원래 작은 것에 감동하죠. 감성적 국민이잖아요. 신영철은 아직도 안 물러나고 뻔뻔히 자기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싶지 않죠....

    • BlogIcon 꿈뱀파이어 2009/08/20 10:58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저도 솔직히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법관은, 특히 법정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날 신영철 대법관의 모습은 씁쓸했습니다.

  5. 한 유진 2009/08/20 12:50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김대중 대통령님!! 많은 고생 하셨습니다...영원무궁토록 위대한 업적을 그리며 살겠습니다

  6. 앙스 2009/08/20 16:06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님이 계시기에 이런 글도 읽을 수 있네요. 같은 민족끼리도 이런데 일제시대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인간의 삶이 이런 것일까요? 노비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멈추지 않듯이 세월이 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아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끊임없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소중한 정보를 널리 알려서 나처럼 모르고 있던 그저 상상만하던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님의 용기있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에 감사드립니다.